03 일이 무너지던 해

유럽 케이팝 팬은 가수보다 케이팝을 좋아했습니다

한국에서 인지도가 낮은 팀인데 유럽에 확고한 팬덤이 있는 경우를 자주 봤습니다. 현장에서 본 유럽 케이팝 팬층 이야기입니다.

2018년 여름에는 한 래퍼의 유럽투어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8월 말부터 9월까지 여섯 나라를 도는 일정이었어요.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폴란드 바르샤바, 스페인 마드리드, 네덜란드 로테르담, 그리고 마지막이 독일 쾰른이었습니다.

투어 안내문을 만들면서 사소한 데서 걸렸습니다. 날짜 표기입니다. 우리는 월을 먼저 쓰는데 유럽은 일을 먼저 씁니다. 생일을 적을 때도 일, 월, 연도 순서예요. 이걸 반대로 적어놓으면 공연 날짜가 통째로 달라집니다.

공급이 늘어난 시점이 있었습니다

2017년 이전에는 케이팝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은데 실제 공연이 거의 없었습니다. 2017년 하반기를 지나면서 유럽 안에서 한국 가수와 접촉하고 공연을 짜는 프로모터가 늘더군요. 그 뒤로는 두 달에 한 번꼴로 어딘가에서 한국 가수 공연이 열렸어요.

한국에서 보던 인기와 달랐습니다

제일 자주 놀란 지점입니다. 한국에서 이름을 크게 못 알린 팀인데 유럽에 단단한 팬덤이 있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이유를 현장에서 보면 좀 이해가 됩니다. 특정 가수를 좋아해서 오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었어요. 케이팝이라는 것 자체, 한국 문화 자체에 관심이 있어서 오는 사람이 꽤 있었습니다. 자기 최애가 아니어도 표를 사서 옵니다.

표를 파는 입장에서 이건 예측이 안 되는 변수였습니다. 어떤 공연은 몇 분 만에 닫히고 어떤 공연은 끝까지 안 팔립니다. 팀의 인지도만 놓고 예상하면 자주 빗나갔어요.

티켓 오픈하고 몇 분 만에 매진되는 걸 본 적도 있습니다. 한국에서 직접 안 겪어본 분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열기가 셉니다.

그래서 케이팝 유럽투어라고 검색해보면 우리가 잘 모르는 팀 이름이 꽤 나옵니다. 그게 개별 가수의 힘이라기보다 한국 문화 쪽으로 쏠린 관심의 크기를 보여주는 거라고 저는 봤습니다.

SNS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해외 팬과 닿는 통로가 대부분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이었습니다. 그쪽 취향에 맞는 걸 만들어보겠다고 시간을 많이 썼어요. 그러다 보니 어느새 마케터에 가까운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읽고 오래 남은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이 콘텐츠가 성공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길게 설명할 수 있는 콘텐츠는 대체로 실패한다는 말이었습니다.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 뜨끔한 이야기였어요.

길게 쓴 글보다 한눈에 들어오는 게 먼저 소비된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알고 있는 것과 그렇게 만드는 건 다른 일이었습니다.

그때 붙잡고 있던 말

어려운 일은 계속 나왔고 그만두고 싶어지는 날도 자주 왔습니다. 그때마다 야구에서 나온 말 하나를 떠올렸습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말이요.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길게 적었지만 그때 제 속마음은 얼른 잘 풀렸으면 좋겠다는 것에 가까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