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코딩으로

열쇠 두 개를 방 안에 두고 나왔습니다

빨래하러 나갔다가 열쇠를 두고 나왔습니다. 그날 하루에 85유로를 썼고, 저녁에는 파이썬 문제 하나로 몇 시간을 헤맸습니다.

2018년 8월이었습니다. 그날 하루에 생각지도 못한 일이 세 번 일어났습니다.

이런 걸 굳이 분류하고 있으면 예전에 TV에서 본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어떤 개그맨이 후배에게 물었답니다. 이 계란의 용도가 몇 가지나 될 것 같으냐고요.

보통은 이렇게 답하죠. 삶아서도 먹고, 후라이도 하고.

그 사람의 답은 달랐습니다. 이만삼천팔백 가지쯤 말할 수 있다고 했어요. 지나가는 아이 머리에 맞혀도 되고, 5층에서 2층으로 던져도 된다면서요.

그 대목에서 저는 이 사람이 천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침

룸메이트와 빨래를 하러 나갔습니다. 그 전에 서로 좋은 이야기를 주고받은 상태가 아니어서 둘 다 기운이 없었어요.

돌아와서 문 앞에 섰는데 열쇠가 없었어요. 두 개 다 방 안에 있었습니다.

독일에서 집에 열쇠를 두고 나오면 열쇠수리공을 불러야 합니다. 이쪽 기술자는 전문가 대접을 받아서 출장비가 셉니다. 얼마나 센지는 부르기 전까지 감이 안 옵니다. 부르고 나면 알게 되고요.

그날 알았습니다.

친구와 85유로를 냈어요. 문 하나 여는 데 그 돈이 나가는 걸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좀 묘합니다.

나가기 전에 한 번만 확인했으면 그 돈은 그대로 지갑에 있었을 겁니다.

오후

잘못 부과된 수수료를 환불해야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명단을 하나하나 대조하고 환율을 맞춰봐야 하는 일이라, 손대기 전부터 하기 싫은 종류의 작업이었어요.

그런데 막상 앉아서 하니까 생각보다 빨리 끝났습니다. 들여다보면 그냥 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일이었습니다. 미루는 동안 머릿속에서만 커져 있었던 거죠.

저녁

그 무렵 파이썬을 보고 있었습니다. False, False, True를 출력하면 되는 간단한 문제였어요.

저는 엉뚱한 데를 계속 붙잡고 있었습니다. 중요한 부분은 그냥 지나쳤고요. 결국 힌트를 봤는데, 한 줄이면 되는 거였습니다.

그 순간의 기분은 좀 이상합니다. 풀려서 시원한 것보다 여태 뭘 한 건가 싶은 쪽이 큽니다.

하루를 놓고 보니

생각지도 못했다는 말을 자주 씁니다. 그날 일들을 다시 보면 대부분 당연히 생각할 수 있었던 것들이었습니다.

열쇠는 나가기 전에 보면 되는 거고, 수수료 건은 그냥 앉으면 되는 거고, 코드 문제는 순서대로 봤으면 되는 거였어요. 세 개 다 제 서두름에서 나왔습니다.

85유로는 아까웠는데, 이 하루가 남긴 게 그것만은 아니라서 여기 적어둡니다.